1929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박 할머니에게 어린 날은 “생각만 해도 자꾸 눈물이 나는” 시절입니다. 두 살배기 박 할머니를 어머니 없이 돌보느라 아버지는 생업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약 살 돈이 없어 된장을 발랐습니다.
어린 박 할머니는 따가워서 울고, 아버지도 따라서 울었습니다. 서러운 가난은 악착을 남겼습니다.박할머니는 왕십리에 살던 10살 때부터 서울역에서 김밥을 팔며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남편을 만났지만 아이를 못 낳는다며 시댁에서 맨몸으로 쫓겨났습니다. 척박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할머니는 이때부터 궂은 일 마다 않고 장사를 했습니다.
가난한 어린시절, 결혼 후 강제 이혼까지 당했던 할머니는 그야말로 목숨걸고 돈을 벌었습니다.

공사장 식당을 하다 1988년쯤에는 경기도 성남시 남한산성 꼭대기로 자리를 옮겨 등산객들에게 김밥과 도토리묵, 음료수 등을 팔았습니다.
몸에 배인 부지런함과 ‘손맛’으로 할머니의 장사는 호황을 누렸습니다. 돈 쓰는 것이 아까워 먹고 싶은 것 먹지 않고, 아픈 곳이 있어도 병원 한 번 제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지독하게 돈을 벌었던 할머니.
어느 순간 돈을 의미있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기부를 결심합니다. ‘피 같은 돈’을 아낌없이 내놓으며 봉사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이때부터 할머니의 삶은 ‘헌신적인 봉사’와 ‘통큰 기부였습니다.
박 할머니는 마흔 살 무렵부터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활동에 나섰습니다. 60대에 장사를 그만둔 뒤에는 갈 곳 없는 정신지체 장애인 11명을 집으로 데려와 20년간 아이들을 밥 먹이고, 대소변을 치우며 자식처럼 돌봤습니다.

어렵게 모은 재산 중 3억3000만원은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기부했는데, TV를 보다가 어렵고 힘든 아이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무작정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전화를 걸고 찾아가 직접 기부를 한 것입니다.
장애인 거주시설을 짓기 위해 ‘성남작은예수의집’ 건립금으로 3억원을 기부했습니다.
박 할머니는 기부를 결심한 이유에 대해 “젊어서는 불행도 겪었고, 고생도 하면서 번 돈이지만 즐겁게 쓰고 싶었다”며 “억만금을 주고도 사지 못할 행복을 샀기 때문에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박 할머니는 월셋집 보증금의 일부인 2000만원 마저 기부한 뒤 복지시설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사망 후 남은 재산은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기부하겠다는 유언도 남겼습니다. 할머니는 모든 재산을 사회에 내놓은 것입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남을 도울 때 가장 즐겁다. 장애인을 도울 때는 있던 걱정도 싹 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박 할머니는 2008년 경기도의 ‘선행도민상’을 수상했고, 2021년 LG복지재단으로부터 ‘LG의인상’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