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01년 중국으로 출국, 행방이 묘연해진 신중철(申重哲·55·예비역 육군대령)씨는 ‘모범 귀순자’였습니다.
귀순후 우리 군에서 고속승진을 거듭한 신씨의 경력만 봐도 신씨의 평판이 매우 좋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북한군 13사단 민경수색대대 참모장(대위)으로 근무하다 1983년 강원 양구 지역 휴전선을 넘어 귀순한 신씨는 3개월 뒤인 그해 8월 우리 군대에 소령으로 입대했습니다.
이후 4년만인 87년엔 중령, 91년엔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귀순용사 이웅평씨와 함께 가장 높은 계급장을 달았습니다.


그의 승진은 남한출신 군인들보다도 더 빨라 일부 장교들이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고 군당국은 전했습니다.
신씨의 순탄한 군생활은 그의 북한이력과 폭넓은 대인관계가 뒷받침했습니다. 신씨는 귀순 직후 군 당국에 ‘강원도 양구 북방에 땅굴이 있다’는 정보를 제공해 90년 북한의 제4땅굴을 발견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육군 고위장교들은 “현재 야전에 적용중인 국군의 대북 전술교범이 사실상 신씨가 갖고 온 북한군 정보에 따른 결과물”이라며 “따라서 그의 정보기여도가 높았다”고 평가했습니다.
국방부의 한 장성은 “신씨는 갖가지 전술회의와 정보분석, 그리고 쉴새 없이 밀려드는 육·해·공군 및 대민강연 등에도 성실히 응하는 등 바쁜 생활 속에서도 원만한 인간관계로 군동료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내로라하는 군내 고위장성들이 그를 드러내 놓고 특별히 잘 돌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이같은 그의 경력과 기여도에 따라 그는 줄곧 대북정보 분야를 맡았습니다. 군의 그에 대한 신뢰가 높음을 입증한 셈입니다.
또 당시 한국군대 상황에 대해 꼬집는 말을 했다고도 하는데요. 지만원을 만난 신중철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북한 사단장은 토의 주재를 참 잘 합니다. 소위도 사단장을 마음대로 비판하지요. 진나게 토의하면 결론이 나옵니다.
사단장이 결론을 요약하지요. 그래서 박수를 치는 겁니다. 남한에서는 그 박수 치는 걸 강제로 치는 것이라고 교육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정작 민주 군대라고 하는 한국 사단에서는 예외 없이 사단장이 황제더군요.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대령도 사단장에게 제대로 소신 있는 말을 하지 못하더군요. 절절 매는 대령들이 대부분이구요. 전시에 어떻게 작전을 위한 토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매우 위험합디다.”
개인생활도 순탄했습니다. 신씨는 소령 임관 2개월 만인 83년 10월 신학교 여학생과 결혼했으며 슬하에 딸 둘을 두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인의 영향을 받아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그는 전도사로 1·21사태의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씨가 설립한 기독인 월남용사 선교회에서 부회장직을 맡았습니다.


특히 북한교회 재건운동 및 북한 선교활동에 큰 관심을 보여 각종 교회관련 행사에서 한국기독교가 북한 선교에 적극 참여해줄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신씨가 왜 갑자기 중국으로 출국했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당국은 현재 신씨 사건과 관련, 특별추적팀과 조사팀을 구성해 가동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신씨가 최근 1년짜리 중국 단수여권을 취득했으며,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여성과 함께 출국한 사실만 파악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당국은 우리측의 끈질긴 추적에도 불구하고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미뤄 중국 내에서 은신중이거나, 또 다른 나라로 갔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신씨가 북한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한 당국자는 이와 관련, “중국에 북한요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는 점이 아무래도 걸린다”고 말했습니다.